결벽증 남자가 씻으러 간 사이 / 김이듬

홍수연기자 | 기사입력 2020/10/22 [10:59]

결벽증 남자가 씻으러 간 사이 / 김이듬

홍수연기자 | 기사입력시간 : 2020/10/22 [10:59] | 조회수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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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벽증 남자가 씻으러 간 사이

​                  

           김이듬

 네가 씻으러 들어간 후 나는 거울을 본다 천천히 옷을 벗는다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직시하는 거울을 피해 침대 모서리로 가 웅크렸다 거울을 본다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거울을 본다 냉장고를 열고 물을 마신다 거울을 꺼내 본다

 

 네가 먼저 씻으러 들어간 사이 난 라디오를 켜고 창밖을 바라보지 않는다 쇠락해가는 거리를 물끄러미 보지 않고 거울을 본다

 아직 멀었어?

 비누칠 하고 있어

 나는 네 시계를 보고 네 안경을 껴보고 네 휴대전화를 열어본다 옷장을 열고 가지런히 걸린 흰색 와이셔츠를 세어본다

 뭐해?

 

 수염 좀 깎으려고

  헤아릴 수 없는 균 때문일까 말할 수 없는 심리적 불결 때문일까 비누에 묻은 비누 때문에 씻고 또 씻는 걸까 그래 씻어 씻어라 하나도 남김없이 얼굴이 없어지고 형태가 뭉개질 때까지

 나는 커피를 마신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이것들은 마음대로 꽂힌 게 아니다 무서운 질서와 배열 속에서 책가위한 책을 읽는다 서문이 길다 다시 커피를 마시려다 맥주를 마신다 넘쳐흐르는

 나는 발가벗고 나는 비스듬히 나는 수치심도 없이 나는 반쯤 넋을 놓고 나는 누드 해변에서 나는 위생학과 예방의학 이따위 책을 집어던지고 나는 불순하게 더더욱 음란하게

 나는 쓴다 쓴다 쓴다 네가 씻는 것처럼

 야, 다 씻었어?

 아니, 비누가 씻기지 않아, 수압도 약해

 넌 나오지 못할 거야 문고리를 쥐면 또 씻어야 하니까 내게 접근할 뿐 만지지 않겠지 너는 씻는다 멈추고 싶지만 씻고 씻고 씻으면서 오염되고 죽어가고 또 씻는다 시도 때도 없이

 서로의 바깥에서, 한평생, 그런 게 남았다면, 너는 씻고 나는 쓴다, 찢고 다시 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 다 거울 앞에서 죽을 거면서

 서로가 나타나지 않기를 기다리며, 강박적으로

 

                     

         전미문학번역상,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수상한 시집『히스테리아』중에서

 

《김이듬 시인》

 

1969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 경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수료. 부산대학교 독문학 학사. 2001년 계간 포에지「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로 등단. 시집으로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달렘의 노래,히스테리아,표류하는 흑발등이 있다. 2020년 미국 문학번역가협회 전미번역상. 2020년 미국 문학번역가협회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 수상

 

 

 

 

 

 “나는 불순하게 더더욱 음란하게 / 나는 쓴다 쓴다 쓴다”

 

 나는 이런 시인이 좋다. “불순하게 더더욱 음란하게” 쓰고 또 쓰며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도전장을 던지는, 때론 투사 같기도 한 시인이 좋다. 시인의 시에 매료되어 시인의 시집은 모두 다 사서 읽은 내가 아니던가. 어느 날 황인숙 시인께 내 졸시(그나마 지금은 쓰지도 못하는)를 보여드린 적이 있다. 그때 황인숙 시인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자기 시에서 김이듬 시인의 냄새가 나!”였다. 좋아하면 닮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때 나는 조금 우쭐하였던 것도 같다.(김이듬 시인에겐 미안하고 또 미안한 일이다.)

 

 그저 얌전하고 순둥이처럼만 보이는 나에게도 저항의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시인은 세상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다. “에라, 마음껏 헐뜯고 씹을 테면 씹어보아라.”는 듯이... 이렇게 자신의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시인이 나는 좋다. 대학시절 대자보 쓰던 솜씨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통쾌하기까지 하다. 활달한 필체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쓰고 “찢고 다시” 쓴다. “거울 앞에서 죽”기로 다짐한 시의 순교자처럼...

 

 “무서운 질서와 배열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균 때문일까 말할 수 없는 심리적 불결 때문일까” 모두 씻고 또 씻고 있을 동안 시인은 쓰고 또 쓴다. “나는 발가벗고 나는 비스듬히 나는 수치심도 없이 나는 반쯤 넋을 놓고 나는 누드 해변에서 나는 위생학과 예방의학 이따위 책을 집어던지고 나는 불순하게 더더욱 음란하게 / 나는 쓴다 쓴다 쓴다 네가 씻는 것처럼” 그러므로 시인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불순하고 음란한 세상을 씻고 또 씻어내는 일인 것이다.

 

 세상아, 누가 이기나, 덤빌 테면 덤벼보아라. 나는 날것의 싱싱하고 붉은 피 뚝뚝 떨어지는 내 살점을 세상의 먹잇감으로 기꺼이 던져주겠다. 물어뜯고 맛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하는 만큼 씹어보시라. 나는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 라고 시인은 말하는 듯하다.

 

 불순하고 음란한(실은 깨끗하고 깨끗한!) 시 쓰기로 미국 문학번역가협회 전미번역상과 미국 문학번역가협회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수상한 시인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홍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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