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에서 / 김옥란시인

양경모시인 | 기사입력시간 : 2019/01/05 [10:57] | 조회수 : 31

 

 

선자령에서

 

 

이쯤에서 길을 잃어도 좋겠다

울긋불긋 펼쳐진

가을 이불 속에서

하강한 시월과 한 열흘

살림 차리고 살다가

데리고 온 근심걱정 바닥나면

잘 여문 시월의 새끼나 얻어서 가지

 

아버지의 쌀가마니

 

쌀값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은

살고 있는 내가

집 한 구석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해가 가면 먹는 나이처럼

바뀌는 줄도 모르게 그 자리에 와 있던

쌀가마니의 부재 때문이다

 

이밥 지천인 세상에다

솥 적다며 울음을 쏟아내는 소쩍새 같이

마트에 쌓인 수많은 이름의 쌀부대 앞에서

아버지를 찾을 수 없어 나는

오래오래 속울음 울며 서 있다

 

쌀밥을 간식처럼 먹는 세상에

배곯지 말라는 당부로 와 있던 쌀가마니

나는 참 오랫동안 그것이

아버지인 줄도 모른 채 먹고 살았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빈자리

노릇한 가을볕이 아버지의 헛기침처럼 다녀간다.

 

봄바다

 

 

정동진에는 젊은 바다가 있다기에

봄바람 따라 갔습니다

 

까딱까딱 투스텝으로 밀려오는 물결은

내가 욕심을 부려 낚싯대를 들이밀 만도 했지요

 

사월의 단련된 햇살이 힘을 실어주어

내장이 보일 것 같은 푸르름으로

그 젊은 바다는 입질도 없이

팽팽한 눈싸움으로 도전합디다

 

어찌나 싱싱하던지

세월 겹겹 달라붙은 내 미끼로는

뒤척이는 비늘 한 자락도

어찌해볼 수 없었지요

 

봄 바다는 내게 무리였지 싶습니다

기가 꺾인 낚싯대로

빈집 뜰에 홀로 자지러지게 핀

서러운 살구꽃 연분홍만 휘젓다 왔습니다.

 

화암사에서

 

화암사 대웅전의 부처는

아무 말 없는데

무슨 설법 들으려고 저 산들은

풀빛옷 깨끗이 갈아입고

그 앞에 나지막이 엎드려 있는가

 

겹겹의 산에 밀려나 앉은 동해가

법당을 나서는 내게 선뜻

눈 맞추며 일어서지만

나는 전해줄 말이 없네

 

내 온몸이 귀가 되어도

듣지 못한 말

반짝이는 나뭇잎들은 알아들은 게지

아름답게 가고 흐뭇하게 오는 길이

저리도 다소곳한 걸보면

 

어지러운 내 심정이

풀빛으로 물들 수 있다면

엎드려 있는 산들의 맨 뒤쯤이면 어떠랴

거기 엎드려 귀만 있는 산이어도 좋겠네

 

죽녹원에서 문득

 

군자라 하여 만나기를 고대하였더니

마디마디 질끈 눈감은 흔적

흐린 물도 마다않고 받아드렸구나

 

속을 비웠다하여 우러렀더니

사방팔방 뻗쳐놓은 발

잡초가 들어앉을 곳 없이 빼곡하네

 

목마름은 천지에 가득하고

맑은 물 탁한 물 구별 없으니

나는 그만 기대를 접으려 하네

 

어미

 

조막만한 뱁새가

덩치 제 몸의 열 배는 됨직한

뻐꾸기 새끼에게 쉴 새 없이 먹이를 물어다 주느라

날개에서 바람소리가 난다

 

우리는 모두 뻐꾸기 새끼지

몸도 마음도 어미보다 훌쩍 커서도

둥지 속의 보살핌을 흔적처럼 안고

큰 부리로 기다리고 있지

 

별난 먹거리라도 생기면

자식의 둥지로 물어다 주지 못해 안달인

어미의 지저귐을 노둣돌 삼아

서슬 푸른 세상의 강을 덤벙덤벙 건너가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 덩치로

늙고 작아진 어미가 물어다 주는

된장, 고추장, 김장, 이지가지

둥지 속의 뻐꾸기 새끼처럼 잘도 받아먹지

 

이 세상의 모든 어미는 뱁새지

손바닥만큼 가진 걸

방석만큼 갖고 있는 자식에게 더 주지 못해

날개짓 바쁜 어미의 눈 먼 사랑이지

 

까막딱다구리

 

절대로 녹지 않는 회색의 눈이

계절 없이 내리는 마을

그 한 모서리를 두드리는 소리

. . .

 

붉은 두건 귀하신 몸이

결코 숲 우거진 오지가 아닌

시멘트 가루 분분한 이곳으로

어쩐 일인가요

 

청산 가는 길 잃고 헤매다

헛디딘 걸음이던 가요

밤나무도 상수리나무도 아닌

여염집 감나무를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

 

아하, 그랬군요

우리들의 밥이 되고 옷이 되고

아이들의 키 값이 되어 사라져버린 풍경

그 빈자리를 견디다

어느 속된 하루를 죽비처럼 치고 갔군요

 

그해 겨울

 

아침밥 푸던 엄마의 손에서 주걱이 부러졌다지

전 날 마신 술의 취기를 앞세우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버지가 출근 하던 날

오래지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달려간 엄마는 오지 않고

알 수없는 불길함으로 숨소리조차 두렵던 밤

남겨진 어린 것들의 가빠진 날숨에

죽었다 살아났다 호롱불 그림자 바람벽을 날아다녔지

울음이 절벽으로 서 있는 눈

엄마 오시나 창호지 문틈으로 내다본 밖은

얼음처럼 차가운 달빛이 새파랗게 날을 세우고 있었고

가랑잎은 마른손톱으로 빈 마당을 할퀴고 있었어

목구멍으로는 헛바람만 들락거렸고

미농지처럼 얇아진 귀에는

동화 속 무서운 이야기들이 들이닥쳤지

어린것들의 눈에서 울음의 절벽이 무너지기 시작 했어

막내가 기어이 폭포를 쏟아냈고

열두 살 큰 누나는 물줄기가 된 막내를 업고

엄마 어디까지 왔나

주막거리까지 왔지

엄마 어디까지 왔나

문진네 집 앞까지 왔지

엄마 어디까지 왔나

덕술네 집 앞까지 왔지다음은 우리집인데

더는 시간을 늘일 수 없는

큰누나의 목소리에 울음이 실리기 시작하는 순간

마당으로 들어서는 급한 발자국소리

엄마다!”

주술에 걸린 토끼처럼 귀가 늘어져서 돌아온 엄마는

품에 안긴 어린 것들의 울음 뒤에 숨어 오래 울었지

아버지의 오른 손을 가져간 그 해 겨울 악몽 같은 밤

 

그리움

 

우리 둘이 그림자처럼 사는 집에

새파란 아이들이 다녀간 날은

잊고 있던 그리움이 더 생생해져

눈물의 분화구를 향해 돌을 던진다

 

거리의 여자처럼 글썽이며

천방지방 따라 나갔던 마음이

북새통으로 일으켜놓은 먼지가 가라앉듯

한 이틀 지나 고개 꺾고 돌아오는 곳에

 

주름살처럼 와 있는 기다림

적막도 버무려 밥으로 먹고 사는

세월 무거운 나는 남고

걸음 가벼운 아이들은 떠나서 산다

 

 

 

 

 

가을비

 

창밖에 발자국소리

자박자박 가을이 오네

 

땀 냄새 좇아오던 모기 대신

맨살에 오소소 소름 돋네

 

저 비는 어느 골목을 지키고 섰다가

가을을 데리고 왔을까

 

강 건너 마을 발정 난 수사슴의

울음소리 길게 젖는 밤

 

빗소리가 분주하고 들뜬 여름을

쓰다듬어 재우네

 

 

약력

 

2000년 월간 문학공간 신인상으로 등단

강릉문협 작가상, 백교문학 우수상

강원문협, 강원여성문학인회, 강릉문협 회원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