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후예 / 정지우시인

백우기자 | 기사입력시간 : 2019/01/16 [18:02] | 조회수 : 181

 

▲     © 한명희



문서의 후예 / 정지우

 

 

옷고름을 여미는 숨

매듭은 실패와 청산을 묘혈에 묻고 시작하는 일이다

붉은 인장은 입김이 피어올린 구절

찢거나 불태워버릴 수 없는

문서의 후예인 사람

살아내야만 하는 초지를 몸에서 펼쳤다

 

지문을 헛돌 듯 안개에 휩싸인 옆구리에서 구릉과 골짜기의 탐욕과 엇갈린 진술이 생겨났다 담장은 요원한 높이, 등에 심은 나무에 스스로 오를 수 없으니 관습을 만들어 되돌아보게 했다 땅을 낳자마자 나눠가진 탓에 불어난 젖을 우기라 불렀다

 

평지와 강을 두고 어긋난 팔과 다리

지경을 넓히는 것보다 지켜야 한다

훤칠한 명지를 얻고 싶다면

사람의 맹지盲地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착란과 화색은 논과 밭에서 일궈낸다

 

폭력의 문장은 심는 대로 거둔 결과, 쑥쑥 낳던 교만한 잡초는 충혈 된 눈에서 재배했다 지혜의 약풀로 머리가 맑아지듯 서명은 수혈하는 일과 같다 재가 된 심장으로 읽는 피의 문서, 육체에서 돋아난 율척(律尺)의 줄기들

 

죽었던 저녁이 오고 아침이 오고 불가능한 손이 바닥을 뒤집으면 문턱을 넘는 양식, 살길 잘했다는 그 곳은 광활한 몸

 

얼굴에서 발견한 마침표에 시작처럼 인장이 찍혀 있다

실패를 딛고 일어난 척추에서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향신료 상인 /정지우

 

 

최초의 흥정은 눈빛이었을 것

보자기를 씌운 손으로 셈하는 수는 나귀로 둔갑하기도 한다.

 

말은 손을 옮겨 다니며 먼 곳을 지향하지만

모든 손짓엔 한 곳으로의 정착이 숨어있다.

 

골목에 들어선 상호(商號)의 시작은 그러했을 것이다.

 

마른 고요로 피운 향은 두통을 지그시 눌러 놓고 흰 연기는 구불구불 빠져나간다는 상술의 첫머리. 창문에 펼쳐진 사막과 낙타의 짐. 상인은 터번에 빨강과 노랑을 웃음에 묻혀 덤으로 팔고 있다.

 

향기를 진열하는 갖가지 궁리들, 먼지로 날아가는 새는 없다지만 새로 날아드는 바람 속에서 상인은 손가락 사이로 가루를 걸러낸다. 제체기로 튀어나온 그린페퍼는 가려운 허공의 말.

 

폭염을 쓰다듬어 줄 시원한 냄새가 있나요. 비둘기의 죽음을 덮을 수 있는 향신료가 있나요. 소량으로 날개보다 넓은 공간을 날아갈 수 있나요.

 

아랍인 손맛은 입자가 고운 식물의 울음

뿔과 이빨을 갈아 마시면 낫는 울음

 

꽃잎과 감정을 주조하면 말이 필요 없는 세계가 들어 있겠지. 부글부글 손가락만 들어있는 몸짓. 향을 나누면 요란한 소리도 구슬처럼 굴러가는 상점으로

 

오직 눈빛으로만 거래하는 상인은 골목을 끌고 태양의 뒤쪽에서 노을을 뿌리고 있다.

 

 

  

 

약력 :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되어 등단.

시집정원사 를 바로 아세요(2018 민음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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