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 박사]의 마인드 숨(breath) 칼럼

‘한번쯤’은 펑펑 울며 말하고 싶어요

김미숙 박사 | 기사입력시간 : 2019/02/08 [21:12] | 조회수 : 196

 

▲     © 한국낭송뉴스



[김미숙 박사]의 마인드 숨(breath) 칼럼

한번쯤은 펑펑 울며 말하고 싶어요

 

핑계 없는 무덤 없다란 옛 속담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죽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산 사람들도 가끔은 무덤에 들어가 있는 거 마냥 죽은 듯이 숨죽어 지낼 수밖에 없는 나름의 억울함있다. 이러한 억울함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실존을 다루는 실존 심리학 용어 중 피투성(被投性)’ 이란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말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도입한 개념으로 인간 개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짐()”당한()” 존재란 뜻이다. 지금 나 자신의 현존은 과거에 대한 선택의 결과물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그렇게 던져진 세상에 나와 사회적 관습이나 부모의 조건화된 가치에 따라 고통과 좌절을 견디며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임의적 존재라는 것이다. ‘피투성이 암시하듯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세상 속에 임의로 던져져 맞서 투쟁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러다 보면 당연히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는 냉정한 현실에 대해 억울한속사정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숙명으로서의 억울함도 가끔은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분노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되면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단 병리적 파괴적 분노 행동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실존적 피투성에 따른 일상적인 억울함과 분노는 어떤 태도로 이해하면 도움이 될까?

 

인간의 심리 내적 역동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분노를 두고 공격성에 비유한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본능적 욕구에 기인한 이유 있는 행동을 하는데, 가령 아이가 배가 고파 엄마의 젖을 요구하는 울음의 행동은 배고픔이라는 생물학적 욕구에 기인한 행동(울음)이라는 것이다. 이때 이 배고픔이라는 욕구가 엄마가 적절히 응해주는 젖으로 채워지게 되면 아이는 엄마의 젖가슴선한 대상으로 기억하고 이를 내면화해서 자기(self)’를 선하게 표상한다. 그 반대로 채워주지 않는 혹은 부적절하게 응하는 엄마의 젖가슴악한 대상으로 자기(self)’를 표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악한 대상으로 엄마의 젖가슴이 반복 경험되는 아이에게는 태어나 처음으로 접한 세상(엄마의 젖가슴)이 자신에게 부절적한 불쾌감을 주는 가해대상으로 여겨지게 되며, 이후 자라면서 자신의 욕구를 좌절시키는 외부 대상을 만날 때마다 자신을 가해하려는 위협적 대상으로 감지하게 되어 이에 대해 공격성을 가지고 분노 행동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가설에 근거한 이론이지만 실제 분노 행동 장애를 가진 대상자들의 경험을 보면 이런 내적 대상의 표상이 대부분 악한 대상으로 점철된 경우가 많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미 알아채셨겠지만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분노 행동을 살펴보면 그 심리적 기저에는 억울함이라는 지배적인 정서가 있고, 그 정서를 내재한 악한 자기 표상공격성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공격성이 적절히 해소되지 못하면 반드시 이를 해소하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고, 이를 스스로 제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게 되면 말 그대로 엉뚱한 곳에 불똥을 튀겨서라도 소진하려는 파괴성으로서의 화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 세상(외적 대상)과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모든 욕구를 온전히 충족할 수 없는 현실에 적응하며 나름대로 일상의 억울함을 간직하며 산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구를 온통 만족하며 살 수도 없단 얘기다. 일전에 어느 시인이 돌아가신 엄마를 5분만 다시 만나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억울했던 사연 딱 하나만 속 시원히 말하고 엄마 젖가슴에 묻혀 엉엉 울었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으로 시를 쓴 것을 본적이 있다. 그 만큼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모든 욕구를 온통 다 들어 줄 전적으로 선한 대상을 소망(wish)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세상 속에 살면서 겪어야 할 현실의 억울함을 온통 들어 줄 전적으로 선한 엄마의 젖가슴이상으로 갈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라게 되는 이러한 인간의 염원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전적으로는 불가하니 누군가 한번쯤은나의 이야기를 아무 조건도 평가도 달지 않고 전적으로 그렇게 믿어 주고 들어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위 시인이 엄마의 품에서 맘 놓고 엉엉 울며 단 5분만이라도 억울한 사연을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갈수록 평가와 판단의 잣대가 넘치는 세상에 우리는 어쩌면 억울하다목 놓아 한번쯤맘 놓고 얘기할 그 누군가가 꼭 필요한 시점은 아닐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해 받고 싶은 억울함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고 들어 줄 이를 찾는 것처럼, 나도 그 누군가의 억울함을 제대로 들어보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우선해서 되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대상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이미 세상은 실존이 아닌 천국이려나?

 

 

김미숙 프로필

 

마인드숨 심리상담코칭 연구소 대표

연세대 상담코칭학 박사(Ph.D)

1급 상담심리사(한국상담심리학회)

심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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